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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파 화보집 연재에 대하여 – 전기·공산주의자 동맹 (戦旗・共産主義者同盟)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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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 한 덩어리의 사진이 있다.손에 쥐면 그리운 사진들.「그 사진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저것도 없다」.…과연, 생각해 보면, 이것은 모종의 잔해.눈에 띄지 않는 사진은, 이미 누군가(그럴 당사자?)의 손에 건네진 것일까.그렇다면, 이대로 두면 된다…, 라고 단념할 수 없는 마음의 아픔과 쓰라린 마음을 품으면서, WEB상의 공개를 생각했다.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이 조금 늘어날 뿐–그렇지만 전기파 역사의 한 장면을 WEB상에 보관하려는 시도도 상당히 매력적이다.바라건대 사장의 운명에 있는 사진이 ‘전기파 컬렉션’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2010년 8월 25일]

‘전기파 컬렉션’ 개설 시 톱페이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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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공산동 사진집과 ‘전기파 컬렉션’에 대해

전기파 컬렉션」이란, 1970~80년대를 앞지른 신좌익의 일당파 「전기파」의 다양한 투쟁의 사진을 Web상에 보존하는 시도의 일환으로서 2010년 8월에 개설된 Web 사이트입니다.2021년 봄경에 링크 만료(소멸?)되어 현재는 열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해당 사이트의 관리인인 草加耕助는 ‘전기파 컬렉션’ 관리자 여러분과 안면이 있어 구두로 사진을 전재 허가받았습니다.특히 동 사이트의 링크 마감을 확인하고, 그 내용을 보존·연명하고 싶다는 생각에 본 사이트에 게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덧붙여 이 페이지의 문장등의 해설은 구 「전기파 컬렉션」으로부터, 좌익 체험이 없는 분에게도 비교적 알기 쉽도록 편집과 가필을 한 것이며, 문책은 소카에 있습니다(지적, 정보 제공등의 연락은 여기 ).

【주의】「전기파 컬렉션」및 당 사이트의 관리인들은, 일찍이 전기파에 소속된 적이 있습니다만, 그 후, 이탈. 그 후계 단체나 활동과는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본 사이트에서의 기술은 개인의 체험에 근거한 사적 견해이며, 과거 당의 견해와의 일치·불일치를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또 사실관계 등 내용의 정확성을 완전히 보증하는 취지도 아닙니다.역사적으로 검증하고 싶으신 분은 원자료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전재·인용 등은 자유롭지만, 그로 인해 생긴 사태는 인용자의 책임으로 돌아갑니다.

당면한 운영방침에 대하여

옥중서한 “희망의 겨울” 보다

개설 경위는 위에 기술한 바와 같습니다.총괄은 왜 그래? 라는 소리도 들려오겠죠. 하지만 여기서는 당장의 운영에 대해 언급하는 데 그칩니다.

구 「전기파 컬렉션」의 관리인 앞에는, 전기파 20년간의 역사의 한 컷을 잘라 찍은 한 무리의 사진이 있었습니다(그 후, 한 덩어리의 필름류가 추가되었다).그것은 연대순으로 정리된 것도 있고, 덩어리인 것도 있고, 전자의 대부분은 사진집『북서풍이 당을 단련한다』(1984년 간행) 제1부·제2부에 게재된 것과 겹쳐 있습니다.

‘전기파 컬렉션’에서는 전자가 정리되어 있는 것을 중심으로 연대순으로 게재되어 1971년에 시작하여 1990년까지 연 단위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그래서 저희 사이트에서도 일단 ‘전기파 컬렉션’의 1990년까지의 내용을 전재·보존한 후에(또는 적시), 소장·넷·인쇄물 등에 산재한 사진을 거기에 추가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넷에서의 자료원에 대해서는 아래 「신세를 진 사이트님」을 참조해 주세요).

또 구 「전기파 컬렉션」에 번외편으로 수록되어 있던 옥중신문이나 산행의 사진, 그 외도 게재해 갈 예정이지만 안타깝게도 산행의 사진을 이곳에서는 거의 보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등산은 전 멤버의 추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기파 컬렉션」관리인님, 혹은 산의 사진, 개인 소장물을 가지고 있어, 이러한 형태로 공개해도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 프라이버시는 배려하오니, 부디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전기파란? – 공산동(전기파) 및 전기·공산동에 대하여

“戦旗派(전기파)” 에 관해서

제1차 분또 (60년 안보: 국회에 육박하는)

여기서 말하는 ‘전기파’란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共産主義者同盟(戦旗派)(공산주의자동맹(전기파))” 및 “戦旗・共産主義者同盟(전기·공산주의자 동맹)” 라는 호칭으로 활동한 신좌익의 한 단체를 지칭합니다.타칭이나 멸칭에서는” 日向(hyuga)派” 또는 “荒(ara)派” 라는 호칭도 있었습니다.관여한 사람의 대부분은 현재 40대부터 70대 중반, 다양한 생각을 안고 시정의 한 구석에서 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그 밖에 코바야시다키지 “게가공선” 유명한 1920년대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의 「전기」파나 1960년 안보 투쟁을 하고 싶었던 제1차 분또 분열시의 전기파 등, 몇개의 「전기파」가 있지만, 그것과는 관계 없습니다.

전기파의 원류는 1966년에 재건된 공산주의자 동맹 (共産主義者同盟2차 분또)사회주의학생동맹 전국위원회 (社会主義学生同盟 全国委員会 약칭:社学同) 에 발합니다.그것이 1970년 안보·오키나와 투쟁 전후의 분트 분열 과정에서 형성된 당파이며, 공산주의자 동맹의 한 분파라는 의미로 「공산주의자 동맹(전기파)共産主義者同盟(戦旗派)을 명명했습니다(사회주의학생동맹의 이론 기관지의 명칭으로부터 「이론 전선파(理論戦線派)」라고 타칭되기도 했습니다).

위와 같이, 본 화보는 어디까지나 戦旗(日向)파의 시선(주관)으로 철된 것입니다.그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다른 섹트 출신으로 납득할 수 없는 분은, 꼭 자신의 주관으로 「OO 컬렉션」을 만들어 주세요.그것들을 제삼자가 비교 열람할 수 있게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戦旗派(전기파)” 호칭 문제

상술한 바와 같이, “전기파”라고 하는 호칭은, 그것만으로는 대상을 특정하기 어려운 번거로움과 혼란스러움을 수반하고 있습니다.이는 1958년 분또 결성 때부터 정식 중앙기관지의 명칭이 “戦旗”이기 때문에 분파에 대해 기관지 발행권을 쥐고 있는 “당 중앙파” 내지 “서기국파”의 가칭이 되어 온 것도 한 요인입니다.

예를 들어 1970년 전후의 제2차 분트의 분열 과정에서는 분파를 강행한 ‘赤軍派 적군파’에 대해 당에 남은 부분을 ‘전기파’라든가 그 후의 ‘叛旗・情況派 반기·상황파’ 의 분열에 있어서도 남은 분트 본체를 ‘전기파’라고 하기도 했습니다.1973년의 전기파 분열에 수반해, 복수의 「전기파」가 병존한 것도, 번거로움에 박차를 가합니다.

같은 명칭으로 두 개의 「전기파」가 양립했기 때문에, 톱의 필명을 따서 「日向파」라고 타칭된 것이, 여기에 말하는 전기파입니다.다른 한쪽은 타칭 「西田파」(= 현재의 공산주의자동맹(통일위원회)파). 이 분열시의 분파는 그 밖에 「프롤레타리아전기」파, 「국제주의」파가 있었습니다.1980년에는 호칭의 혼동성을 피해 戦旗·共産主義者同盟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그 사이, 狭山(Sayama) 차별 재판 규탄 투쟁이나, 三里塚(Sanrizuka=나리타) 현지 투쟁단의 재건을 거쳐 1978년 3.26 관제탑 점거 투쟁제4 인터, 프롤레타리아 청년 동맹(프로 청동) 등 「적헬 3파」혹은 「삼리츠카 투쟁에 연대하는 모임」의 일익으로서 담당해, 게다가 전기·공산동으로 명칭 변경 후의 1980년대에는 삼리츠카나 반천황 투쟁에서의 게릴라·빨치산 전투 등 다양한 싸움을 전개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미사토즈카 투쟁에서 현지의 농민은, 각각이 소유한 단결 오두막의 소재지를 취하고, 여기서 말하는 전기파를 「요코보리(横堀)전기」, 다른 한쪽의 니시다 전기를 「이와야마(岩山)전기」 등으로 호칭해 구별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전기파는 1990년대에 들어와 분파적 호칭을 폐지하고 「공산주의자 동맹」을 자칭한 후, 공산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지 않는 「분토(BUND)」로, 게다가 「에코&피스를 목표로 하는 일반 사단법인 액티오」로 변모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 신좌익 조직으로서의 「전기파」는 해소(소멸)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호칭 문제는 이 정도로 하고, 이하에서는 1970년~1990년의 몇 개의 결절점으로 좁혀 사진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전기파의 역사를 개괄해 나갑시다(인명:경칭략, 주로 필명.파명은 자칭 속칭 혼돈).

1970년 제2차 분또 분열과 전기파 형성과정

a. 1969년 7.6 赤軍派(붉군파) 분파 후 제2차 분트

제2차 분또 (1968 국제반전데이 : 방위청 돌입)

 원래 제2차 분토는 강력한 주류파를 결여하기도 했고, 69년에 무장 봉기를 강경하게 주장하다一向健(=塩見孝也)라의 그룹이「赤軍派(붉군파)」로서 분파를 강행하자 당내는 백가쟁명에 빠졌고, 당내 여러 그룹의 독자화나 지방 조직의 자립화, 그 합종연횡과 같은 상태가 한층 더 진행되었습니다.
 일본공산당도 그렇지만 70년 안보 후에도 살아남았다 革共同中核派, 가죽말파, 社青同解放派 등은, 비교적 강력한 주류가 당내에 존재했다는 것이겠죠. ML파나 구조개혁파계 등, 강력한 당내 주류파가 부재할 경우 분열 소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무튼 주력인 학생운동을 보면, 수도권에서는 1969년 1월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과 28 이후 안보·오키나와 투쟁으로 학생 담당이나 社学同중추부가 잇따라 투옥되어

지도부가 부재한 가운데 나머지 학생의 반수 정도가 赤軍派에 갔고, 바로 학생·고등학생 조직은 혼란의 극치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의도하지 않게 수도권에서의 주류파적 위치에 붙어 버린 것이 중앙 대학계 분또계의 叛旗派(반기파) 일 것입니다. 핍색하고 있던 메이지 대학 독립 사학동계의 情況派(정황파) 도, 메이대의 좌파 부분이 대부분 사라져 버렸으므로 생기 부활합니다.

 관서에서는 관서 상경조를 중심으로 한 赤軍派이외의 잔류 학생은 빨강 헬멧의 논섹트로 변하여, 大阪中電등의 노동자 조직을 중심으로 한 제2차 분또 결성 전의 지방 독립 세력인 ‘간사이 분또‘로 회귀하고 있었습니다.

사사키 서기장과 기타 도쿄에 잔존한 지도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69년 가을 안보결전은 불완전 연소에 그쳤고, 출옥한 藤本敏夫(반제 전학련 위원장)등도 이탈해 가는 곤경 속에서 197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b. 1970년 초의 제2차 분또

중앙 기관지의 「전기」와는 별도로, 지방·부현·지구 위원회등의 기관지지가 독자적으로(멋대로) 많이 발행되어 이것이 각 그룹(당내 제파)의 결집축이 되어 갔습니다. 조금 번거로우시겠지만 분또 분해 후의 행방을 포함하여 대충 정리해 둡니다.

『戦旗(전기』『共産主義(공산주의 발행:共産主義者同盟(제1차 분또 기관지 이름 계승)。1969-70년경의 『전기』편집 발행인은 佐々木和雄・野田晋 들이었다. 중앙의 서기국 편집국이 여러 파를 조정하여 발간하고 있었다.。소부선 스이도바시역 근처(치요다구 미사키쵸 2-7-6) 타키자와 빌딩 지하 1층에 있던 사무소(戦旗社)가 각파의 쟁탈 대상이 된 적도.

■ 『理論戦線(이론 전선 발행:社会主義学生同盟→共産主義青年同盟. 野田晋(’전기’ 편집국장)、日向翔(社学同위원장)、伊勢洋(학생 담당자)、城山徹(同)、村中泰、赤井文人、西田輝 등, 후의 전기파를 형성하는 주요 멤버가 집필.「理論戦線派」라는 타칭은 이 기관지명에서. →1980년부터 戦旗・共産主義者同盟 의 이론 기관지.

■ 『叛旗(반기 발행:도쿄·미타마 지구 위원회(1968/11 창간). 三上治・神津陽(中大분트)등→1970년 6월, 叛旗派결성.아오야마학원대를 비롯해 수도권과 전국 학생 가운데 길동무 많았다.
6월 11일 도쿄 이케부쿠로의 도요시마 공회당에서 열린 “共産同 정치 집회” 도중,叛旗・情況연합이 戦旗派연합에 게발트를 장치, 분열 확정.→1975년 三上治가 탈퇴했다→1976년 말에 자진 해산.
 9.16 나리타 투쟁 동봉 사거리 전투 피고들의 구원 등을 목적으로 발족된 라고 생각되다「旧叛旗派상조회」神津陽들을 중심으로 지금도 존속.

■ 『鉄의戦線(철의 전선 발행:도쿄 남부 지구 위원회。동맹 8차 대회의 의장、仏徳二(Saragi tokuji)들의 그룹. 도쿄 남부 지구나 전수대학교 사학동, 의학련 학생 등→1970.12.18「蜂起戦争派」→「鉄의戦線」派
→「蜂起派(봉기파)」(타칭:Saragi派、기관지『蜂起(봉기)』)と蜂起左派(봉기 좌파 佐藤秋雄 들→共産同「프롤레타리아 통신」편집 위원회)등으로 분기.
→그 후 1998년경, 仏徳二이탈、기관지명을『赤星(붉별)』로 변경.
→2009년 3월, 槙渡&赤井隆樹(共産同蜂起派)들이, 畑中文治(情況派 의 흐름을 이어받다 共産同首都圏委(공산 동수도권 위원회))、旭凡太郎(神奈川左派(카나가와좌파)→共産同「프롤레타리아 통신」편집 위원회)들과 함께「共産主義者協議会(공산주의자 협의회)」(기관지『붉은 프롤레타리아』)を結成。’붉별’ 은 합류해 휴간한다.
→ 2016년 1월에 명칭을『The Red Stars』으로 변경하여 재간. 협의회는 해체.

 『左派(좌파 발행:가나가와현 위원회(1970/1 창간). 旭凡太郎(간사이 그룹/동맹 제7회 대회의 정치국원)등→1970.12.18「봉기 전쟁파」→(神奈川)「左派」派。
→그 뒤, 共産同「프롤레타리아通信」編集委員会(타칭「도요시마 그룹」。소식통에 의하면,蜂起左派 와 赤報派의 소수파가 합류하다)→2009년, 상기「共産主義者協議会」에 참가.

■ 『烽火(노로시=봉화)』 발행:간사이 지방 위원회 (1970/8 재간 1)→1970.12.18「蜂起戦争派」→「烽火」派→共産主義者同盟全国委員会(烽火派)와, 榎原均「赤報派」共産主義者同盟(RG)으로 분열.
→그 후 2004년, 全国委員会派 는 戦旗西田派 와 조직 합동、共産主義者同盟(統一委員会)를 자칭하다. 기관지는『戦旗』에 통합.

RG 란 ?
독일어.Rote Gewalt (직역 “붉은 위력”, “붉은 폭력”. 의역 “공산주의 돌격대”) 의 줄임말.원래는, 塩見孝也(간사이 상경 쌍, 7회 대회 정치국원, 나중에 赤軍派 의장)들의 발안. 1969.4.28 오키나와 투쟁으로 전날 밤부터 오차노미즈 MD(도쿄의과치과대)를 무장 점거하고, 기동대 벽을 깨고 아키하바라역→수도 중추로 돌격했다 社学同 등의 부대가 그렇게 불렸다.
그 뒤, 들은 보다 군사색이 강하다 “赤軍” 건설을 지향했다. 한편, 赤軍派분열 후의 분또에서는 1969년 가을 안보·오키나와 결전을 위해, 叛旗・情況이외의 각파가 소수 정예군의 의미를 갖게 하여「RG」를 조직하였다. 나중에, 榎原均 들이 烽火=칸사이파 로부터의 분열에 있어서, 자파명에 이용.

봉기 전쟁파(蜂起戦争派) 란 ?
1971.4.28 오키나와 데이 때, 도쿄 시미즈타니 공원에서 공동 집회를 가진 12.18 연합 분또(=神奈川[左派]派・関西地方委派・仏(Saragi)派 의 3파)및 共産同赤軍派、京浜安保共闘(게이힌 안보 공투)、적색헬계 논섹트의 同志社大学全学闘, 京都大学C戦線 등의 공동 전선의 자칭 입니다. 반드시 분파의 명칭은 아니다.(Saragi派 는 집회 참가 안하고 시위만 합류?) 히비야공원 니시유키몬구치에서 戦旗派와 격돌한 것은 조직으로는 12.18 연합 분트뿐이었다.(→1971년 참조)。당시의 전기파 내에서는 그들을 「야합우파」라고 멸칭.

■ 『로테 발행: 공산주의자 동맹 재건 준비 위원회 情況派(정황파 명대 독립 사학동→6회 대회 의장 松本礼二, 동학쌍 古賀暹 들) 는 1970년 6월에 분또에서 분열된 후에 기관지 『로테』 발행을 시작합니다.
→후,松本礼二 는 「멀리서」를 발행. 古賀暹 는 1990년, 廣松渉 와 함께 제2기『情況』창간합니다. 情況派 의 계통은 遊撃派(유격파)→革命의旗派(혁명의 기파)→赫旗派(적기파) 등의 변천을 거치면서 계통의 일파=首都圏委員会(수도권 위원회) 가 2009년, 상기「공산주의자 협의회」을 결성.

c. 戦旗派(전기파) 의 형성

 상기 이외에도 B4 사이즈의 갱지, 갈리판 인쇄, ・호치키스 철의「기관지」도 많이 나와 있으며, 그 중에서 훗날 전기파의 결집축이 된 것이

『붉은 텍사스』 발행:도쿄 서부 지구 반제 전선. 이것은,1969년 가을 ‘안보·오키나와 결선’ 이후 수도권 학생·고등학생 조직의 일부와 도쿄대 투쟁의 보석자 등이 결합했다 ‘妖雲亭(요운정)‘프랙션 에 의한 발행으로, 주요 논문은 후에 「이론 전선」에 수록되었습니다.

여기에 전항과 같은 중앙·간사이 그룹과는 거리를 두고 있던 규슈·홋카이도·아이치 등의 지방조직이 연계하여, 전공투 이후의 방향성을 요구하고 있던 무당파 논섹트 학생의 일부도 합류. 중앙기관지 『전기』편집발행인의 野田晋도 참가합니다.

이로 인해, 어떻게 보면 자유롭지만 무책임한 “각파의 연합당”으로부터, 현장이나 지방을 책임지는 “단일 중앙집권당”으로의 탈피를 중앙 각파에 강력하게 요구하는 조류가 형성되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당 기관인 「청학 조직 위원회」를 발판으로, 이 조류는 단기간에 당중앙으로의 진출을 완수합니다.

1971년 4.28 히비야공원에서 反戦旗派연합과의 마지막 회전에 임하다

이윽고 전항과 같이 1970년 6월 叛旗・情況파 가 분열된 후,12월 18일에는 남은 분또 본체(’전기파’라고 타칭되어 있었습니다)에서, 봉기 전쟁파 3파(간사이 지방위파・철의 전선파.・가나가와 ‘좌파’파)단독으로 ‘공산주의자 동맹 정치집회’ 개최 강행(=12.18연합 분또)3파 공동으로 독자적인 ‘전기’를 발행하는 등, 전기(중앙)파와의 절연을 선언하여 분열이 확정됩니다.

 전기(중앙)파는 당일 오키나와 집회에서의 대중적인 등장을 걸고 1971년 4.28 히비야 공원에반전기파 연합 와 회전하여, 이에 압승합니다. 12.18연합 분토는 이 참패 여파로 분규, 내부 붕괴.연합분트판 ‘전기’ 발행도 정지(250호~264호의 통산 14호분이 중앙의 ‘전기’와 병존하고 있었다)하는 등, 각 분파 마다 제각각으로 되어, 연합 분트는 해소합니다.

 이후 전기파는「분파 투쟁의 지양과 대권력 투쟁으로의 전환」을 선언하고,자신들 또한 분또의 1분파라는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동맹(전기파)이라고 스스로를 칭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전항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각 파의 이합집산은 계속되지만,이로써 제2차 분또 에서의 분파 투쟁은 일단 매듭지어졌습니다.

【草加메모】 공산주의자 동맹(=분트)의 분파투쟁 초기에는,서로 자신들이 정통 분또(정식 당중앙)이며,나머지는 반당분자-분파라는 주장으로,대중에게 자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일이 있었습니다.하지만 일본 공산당이나 핵심파 같은 「강력한 주류파」를 가지지 않았던 분토는, 어디가 정통인가 하는 것은, 타인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아무래도 좋은) 주장입니다.
 단지, 일단 그렇게 주장한 한, 나중에 그것을 철회하는 것은 말하기 어렵습니다만,집안 분파 투쟁을 매듭짓고 본래의 대권력 투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현상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이겠지요.이 당시에 그것을 행한 판단은 전기파적으로는 높게 평가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것에 의해서 분파간이나 제파와의 무력 충돌(게발트)이 완전히 해소되었는가 하면, 아니. 그렇게 간단하게 「은수의 저편으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후 오키나와 반환을 둘러싼 수많은 대권력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한편 1970년 전반기의 赤軍派(붉군파)やML파(=분또의 흐름을 이어가는 마오쩌둥파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1970년 6월 이후 분열 소멸)、같은 해 후반~71년 4.28까지의 叛旗파(반기파)、4. 28 이후 봉기전쟁파 계열 제파 및 情況派(정황파)、더욱이 논섹트(메이지 대학 신문회=MUP공투)와의 게발트가 1973년초까지 간헐적으로 발생합니다.(MUP공투 습격 및「破防法(하보호)재판 투쟁을 지지하는 모임」K씨에 대한 습격은 나중에 ‘전기’지상에서 자기비판)그 과정에서 전기파에는 내부 분열의 싹도 돋아 있었습니다.

【草加메모】 분파끼리의 내부싸움은 주먹다짐이나 깃대 전투 정도의 한도를 넘지 않는 범위라면 이기든 지든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합니다만,MUP 공투와 같은 외부의 논섹트까지 같은 감각으로 손을 대는 것은, 당파의 도덕성으로서 지나치다.핵심파를 웃지 못해요.자기비판을 해야 마땅했습니다.뭐 핵심파는 아직 그런 과거에 자기 비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훨씬 낫긴 하지만요.

1973년 ‘전기파’ 분열

1973년 10·21 국제반전투쟁 니시다 전기와 별대열로 등장해 분열이 공공연화

1973년 6월, 카나가와현 시모▽▽랜드에서 개최된 제12회 중앙 위원회에서 공산주의자 동맹(전기파)은 사실상 분열됩니다(10월에 분열 확정). 1970年初頭、「요운정」프랙션 이후의 전기파 제1기 건설은 여기에 좌절되어 재출발을 재촉당한 것입니다.

조직의 본연의 자세나 무장 투쟁·노선 문제를 둘러싼 대립점이나, 분열한 경위의 설명이나 변명은, 그 후의 각파로부터 각종 표명이 이루어졌습니다.그 내용은 매우 번거롭고 당시 중앙위원들의 움직임을 일일이 알 수 없으며, 또한 이곳은 정통 운운하는 자리도 아니므로 외형적으로 부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계열적으로 되돌아보면 1972년 말에는 시부야 그룹 (→국제주의파)가,1973년 3월에는 아다치상회 그룹(西田·大下·城山→西田·大下파 와 城山파 로 분기. 아다치 상회는 이 그룹이 마련한 사무실의 가명)가 형성됩니다. 西田들에 따르면 이는 1972년 여름 이후의「日向중앙파에 의한 분파적 조직 운영에 대한 대항」로 되어 있습니다만,日向들에 의하면「西田등이 각각의 담당 지구·지방을 에워싸고 N의 관료적 운영에 대한 반발도 이용하여 분파를 형성하였다」가 됩니다.

덧붙여서 말하면,이 시기의 조직은, 대회─(확대)중앙 위원회─(상임)중앙 위원회 하에 각 지방·지구위원회가 운영되고 있으며,「제○회」라고 붙여지는 (확대) 중앙위원회는, 상임중앙위원과 지방·지구 대표로 구성되었으며,아직 동맹원대회가 열리지 않았을 당시에는 최고의 결정기관이었습니다.

 또한 각 분파의 세력개요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이(지구 등은 다수파의 동향으로 분류, 소수 인원은 생략,중복된 것은 거의 2분의 경우. ★는 개산 비교. 각 파 명칭은 발행 기관지 지명에 ‘파’를 붙였다).

  • 戦旗派 전기파(日向타) 도쿄 서부, 사이타마, 가나가와, 아이치, 중국(돗토리)
     ★★★★★★★★
  • 戦旗派 전기파(西田타) 도쿄 중북부·남부·동부, 가나가와, 중국(야마구치), 큐슈, 오키나와, 미사토즈카현투단, 부락해방전선
     ★★★★★★★★★★★
  • プロレタリア戦旗派 프롤레타리아 전기파(城山타) 홋카이도
     ★★★★
  • 国際主義派 국제주의파  수도권 학생·노동자 일부
     ★

1973년 ‘전기파 분열’에서 특기할 것은 우치게바(무력 충돌)에 이르지 못했다 하겠지요.이후 주먹다짐 등이 전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로 다른 파의 물리적 해체를 목적화하지는 않았습니다.

1970년 전후부터 격렬화·상태화되었던 신좌익 내부의 안게바에의 몰입도를 피하기 위해 방향을 선점한 것──이는 전기파적으로는 MUP공투습격에 대한 자기비판 등,독단적 섹트주의·내게바주의적 편향에 대한 반성의 구체화로서 그 후의 경위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건 맞는데 근데 좀 멋있어? 상실한 동료, 그리고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 분열에 이르는 과정과 그 전후로 잇달아 전기파를 떠났다……。

【草加메모】목숨을 걸고 왔는데 하루아침에 절반은커녕 3분의 1 동원에.힘들었겠다…。이탈자뿐만 아니라 자살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베트남 반전이나 안보·오키나와 문제, 학원투쟁 등을 계기로 분또에 결집한 전기파 활동가의 정신은, 제파·논섹트와의 내부 게발트나, 연이은 분파 투쟁으로 소모·피폐해져 있어,이제 권력과 싸우는 것 이외의 기력도 부대도 남아있지 않았고 내부 게발트가 없다면 활동을 계속하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그로인해 상처가 아물지는 않더라도)

그리고 1974년 7.7「血債(피채)・猛省(맹렬 반성)」을 내세운 정치 집회 그래서 전기파는 재출발을 결심합니다(제2기 건설).이후에는 분파투쟁이나 정통파 싸움의 소모로부터 해방된 단일당으로서,사야마 차별 재판 규탄 투쟁,반천황 투쟁,산리즈카(나리타 투쟁) 현지 투쟁단 재건 등, 많은 사람들에게 배우고 처음부터 다시 단련하면서 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1974년 77전기파 정치집회(血債(피채)・猛省(맹렬 반성)집회)기조보고자:日向翔

또한 이 과정에서 전기파는 기관지『전기』의 자력으로 인쇄 발행 체제을 정비해 나가겠습니다.처음에는 일문 타입, 이윽고 사진 식자기를 도입하고 인쇄기를 갖추어 B4판의 호치키스 철이라는 시대가 한동안 계속됩니다.그것이 드디어 신문의 체재(타블로이드판)가 되는 것은, 戦旗・共産主義者同盟(전기·공산주의자 동맹)로의 명칭 변경 후의 1980년 연말도 임박했을 무렵이었습니다.(1981년 신년호)。

완전 자력 발행되던 타블로이드판

 73년 전기파 분열로 헤어진 여러 파의 그 뒤를 간단히 적어 둡니다.

  • 戦旗派 전기파(日向타) 공산주의자동맹(전기파)→1980년 ‘전기・공산주의자 동맹’으로 개칭→1993년’공산주의자 동맹’→1997년 ‘분또'(혁명 전략으로서의 공산주의 포기)→2008년 ‘액테오 네트워크‘(평화·환경단체로 변모=공산주의 동맹 & 분또 해소)
  • 戦旗派 전기파(西田타) 공산주의자동맹(전기파)→2004년 공산주의자동맹(전국위원회)=烽火派(봉화파)와 조직 통합하고,’공산주의자동맹(통일위원회)‘을 이름짓다.기관지는 「전기」로 통합.
  • プロレタリア戦旗派 프롤레타리아 전기파(城山타) 프롤레타리아 전기 편집 위원회, 공산주의자동맹(전기파)홋카이도 지방 위원회→1976년 ‘홋카이도 공산주의자 동맹’→현상 불명(자연 소멸인가?)
  • 国際主義派 국제주의파 ’국제주의’ 편집위원회→일본 공산당 소감파 의 흐름을 긷다 일본 공산당(프롤레타리아 혁명파)와 조직 통합하고,’일본공산당(행동파)’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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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자와이즈미 씨로부터의 정보↓(감사)

죄송합니다, 프롤레타리아 전기는 적어도 87년의 황태자(당시) 방문 오키나와 저지 하네다 투쟁에서 4명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고, 타마 지구에 멤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또 조직적으로 어떤지는 별개로 홋카이도 내에서 제 지인의 멤버가 2명, 지금도 시민운동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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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 戦旗・共産主義者同盟へ改称

1988年 7・31 戦旗・共産同政治集会

 이름은 중요해.현재의 아티오 대표도 어딘가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시대·노선·인적 요소 등을 무시하지 말라!고 혼날지도 모르지만, 전기파가 조직적인 대도약을 이룬 것이 ‘전기·공산주의자 동맹’이라고 개칭한 1980년대 들어서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1973년 분열 때 아다치상회파(아다치그룹 전기니시다파)의 뒤를 받던 전기파가 1974년 7.7 집회를 계기로 재출발해 1975-76년경 조직적으로 다소 웃도는 세력으로 회복됐다지만 여기서의 약진으로 80년대 후반 권력 언론으로부터「핵심파와 혁말파에 이은 주요 당파」라고 여겨지게 됩니다.

원래 분열로부터 7년이 지나도 여전히 동명으로 2개의 「전기파」와 2개의 「전기」(기관지)가 존재하고 있던 상황은, 쌍방에 있어서 어땠는가.산리즈카 집회등에서는 같은 회장에서 양파 모두 붉은 헬멧, 깃발도 현수막도 전기파, 기껏해야 제킨이 다소 다를 뿐이라 몹시 헷갈린다.갓 결집한 멤버 등은 당연한 것처럼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칭=정통 싸움이라고 하면 상대방에게 개명을 종용해 봐야 소용없다.선택지는 스스로 개명하는 것밖에 없다.그렇다고 액티오처럼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달리 기본은 계승이어서 전기나 공산주의자 동맹도 포기하기 어렵다.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이름의 안……이런저런 논의 끝에 ‘전기-공산주의자 동맹’으로의 개칭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때로는 1980년 1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도구내에서 개최된 제1차 동맹원 총회에서다.「전기」와 「공산주의자 동맹」의 연결을 「·」(나카구로)로 할지, 「-」(하이픈)으로 할지 결정되어 버리면 사소한 문제도 진지하게 논의되었습니다.명칭 변경과 함께 새로운 규약도 채택해 조직이나 노선·정책의 기본등도 결정했습니다.

조직 최초로 첫 번째 빌딩 건설(84/10)

 분트계의 한 분파라든가, 두 개의 전기 중 하나라는 이른바 굴레에서 해방된 것처럼, 그 이후 전기 공산주의자 동맹의 비약적 신장이 시작됩니다.동년 6월에는 사회주의 학생 동맹을 재건.1980년 한·광주민중봉기연대의 안보·한일투쟁, 1983년 반대동맹 분열을 전후한 삼리총 2기 저지투쟁, 반천황투쟁 등을 둘러싼 게릴라 빨치산 전투와 연계한 대중적 실력투쟁을 전개하면서, 기관지 「전기」의 타블로이드 판화→블랭킷 판화나 본부 빌딩 건설등, 동원적으로도 배배 게임적으로 크게 전진합니다.

개칭을 결정한 이 「동맹원 총회」란, 사실상 전기·공산주의자 동맹의 당대회에 상당합니다.그런데 왜 대회가 아니라 총회라는 호칭일까? ‘대회는 공산주의자동맹 재건대회=10회 대회여야 한다'(2차 분또 대회는 재건의 6회 대회~1969년 9회 대회까지여서 다음은 10회 대회)는 의식이 다소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이론 기관지 이름도, 분트의 기관지였던 “공산주의”라고는 하지 않았다.자신들의 출신 사학동 전국위의 ”이론전선”으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제2차 분트계 제파·개인의 대결집에 의한 재건」(2차 분트와 같은 연합 전선당·파벌 연합)이 아니라, 전기·공산주의자 동맹 자신의 당파적 신장을 기반으로 하여(전국 단일당)라는 것이 공통 인식이었습니다.제2차 분또계의 제파·개인 일부에는 이러한 생각을 가리켜「日向가죽 말주의」등 비판하는 태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제2차 분또 총괄의 시점이나 상황 인식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1980년대를 통해 분또계 제파 중에는 야합적인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당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확실합니다.그러나, 무리하게 야합해 「당」을 이름 짓거나 하지 않고, 다른 강령·규약을 가진 당파가 공통의 과제를 앞에 결성하는 「통일 전선」이라고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 각각의 계보는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쉬운 것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등의 것은 쓸데없는 참견입니다.

그로부터 13년여 뒤인 1993년 8월, 홋카이도에서 개최된 동맹원 총회에서의 「공산주의자 동맹」으로의 개칭이, 전기파 자신의 변용으로의 최초의 작은 방향타가 될 줄은, 물론 그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다…..

감사] 신세를 진 웹사이트 등

 화면상의 표시가 현저하게 번거로워지기 때문에 일일이 명시하는 것은 피했지만, 이 자리를 빌려 이하,참조한 사이트·블로그등의 해당 관리자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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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파 컬렉션’ 사이트를 제작함에 있어서는 사실 확인 등을 위해 ‘북서풍이 당을 단련한다’제1·2부(전기사)외, WEB상에 공개되어 있는 자료·각서등을 참조했습니다.

  • 1968년 전공투였던 시절개인 전단 보관고
    일본 대학 전체 공투회의 전 활동가의 사이트.「개인 전단 보관고」에는 일본 대학 전공투의 전단뿐만 아니라 타 대학의 전공투나 당시의 신좌익 각파의 기관지(일본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붉은 빛』, 공산주의자 동맹『전기』, 공산주의자 동맹 재건위『로테』、공산주의 노동자당『통일』, 통일 사회주의 동맹『선구』, 혁공동핵심파『전진』)、배평련(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반전 자위관의『정렬 쉬어라』등 , 가 수록되어 있다.1970년 전후의 전기사 주소와 『전기』 편집 발행 인명, 각 파 기관지 발행 시기 등을 참조하였다.
  • 野次馬雑記(구경꾼 잡기)
     메이지 대학 신문 학회(MUP), 메이지 대학 전체 공투 회의의 전 활동가의 블로그. 당시 기록 복원과 현장 취재, 명대 전 활동가들의 근황 등이 실려 있다. 1970년 전후의 메이지 대학의 제2차 분또·제파나 전기파의 사정가 당사자만의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그려지고 있다. 링크 사이트명대 전공투·학관투쟁·문련에는 메이지 대학 신문이나 맵 공투 관계 자료 등 메이지 대학 관련 자료 외에, 1968-69 전국 학원 투쟁 「도서관」, 신좌익 당파 기관지·책자 등 다양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 旗旗(기기)「반전 사진관」「회고적 자료실
    1980년대에 전기파의 활동가였던 쿠사가 코스케씨의 개인 사이트.반전사진관 6. 전기공산동화보집에 1986년 당시 전기(戰旗)에 실린 사진이 수록돼 있다.회고적 자료실에 수록된 전기공산 관련 문서류는 전기파가 소멸한 현재 웹상의 귀중한 자료로 몇 가지 사항을 참조했다.
  • Others Link
    공산 취미자에 의한 것인지, 신좌익 제파의 명칭(변천)이 솜씨 좋게 정리되어 있다.
  • れんだいこのページ(레이다이 페이지) 「1971년 이후의 학생 운동
     공산주의자동맹전기파중앙위원회(다수파)를 이름 붙인 아다치상회그룹(니시다파)의「日向 혁말주의-해당파 분쇄해 동맹의 혁명적 재생을(1973년 12월 5일자 니시다파 전기 340호)가 수록돼 있다.1973년 분열에 대한 이들의 설명or변명을 재확인했다.
  • 神津陽 塾
    반기파 해산 시기, 三上治 과의 관계 등 몇 가지 사항을 참조하였다.
  • Wikipedia 카테고리 ‘분토계 제파’에 있는 페이지의 몇 항목 페이지
    제2차 분트나 분트계 제파에 대해 정확하지 않은 기술도 산견하지만, 대략적인 참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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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기기」판의 작성에 있어서, 이하의 사이트님에게도 신세를 졌습니다.

  • 戦旗派コレクション(’전기파 컬렉션’ 현재 링크 만료)
    서두에 기술한 것처럼, 이 화보의 근원이 된 사이트.여러 관리인들이 소장하고 계신 선명한 생사진을 공개하고 있었습니다.본 사이트에서는, 거기에 더해 인쇄물 등에 기록된 불선명한 것도 덧붙여 공개해 나갈 예정입니다.
  • リベラシオン社 BUND Der Kommunisten(리베라시온사)
    60~70년대를 중심으로 각파의 귀중한 기관지지가 대량으로 PDF로 보관.아마 그 규모는 넷상에서는 최대급이라고 생각된다.같은 사건이라도 대립하는 당파끼리의 기관지나 게재 사진을 비교해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 연령적으로 동시대에서 경험하지 못한 관리인 에게는 귀했다.대단히 신세를 진 사이트입니다.
  • ボリューム(E:) (볼륨(E:))
    젊은 관리인이, 학생 운동등에의 학술적인 흥미로부터, 그 조사 자료를 정리한 사이트.타국에서는 비교적 평범하게 학생의 졸업론 테마로서 다루어지기도 하고 있다지만, 일본에서는 드물지도.위의 리베라시온사님이 거대한 자료고이고 활용에는 약간의 예비지식이 있다면 이쪽은 초보자도 알 수 있는 컴팩트하게 정리된 사전과 같은 형태로 활용하게 되었다.